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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불펜의 시간 : 한때는 MVP였지만 지금은 불펜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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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불펜의 시간 : 한때는 MVP였지만 지금은 불펜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

혜등 2023. 9. 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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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시즌 전, 야구에 대한 컨텐츠가 고플 때 찾아서 보게 된 책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불펜 투수에 대한 이야기인데 시작 설정부터 약간 감상에 몰입을 깨는 부분이 있어서 아주 약간의 진입 장벽이 있었지만.. 그래도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을 보는 것은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 그 정도는 넘어가고 읽으려 했다.

하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출판사 공식 홍보에도 쓰이는 '고졸 최고 연봉'이라는 문구가 너무너무 거슬린다. 신입 선수들은 모두 연봉이 같다. 올해는 3,000만원. 고졸 선수 중에 '최고'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면 계약금이 최고라고 했어야했다. 계약금으로만 10억을 받은 한기주 선수, 9억을 받은 장재영 선수까지 그런 사례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신인 선수에게 연봉을 1억 2억 10억 주지는 않는다. 갓 데뷔한 선수는 무조건 최저연봉을 받고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야구라는 스포츠 서사의 외연을 넓힌다...는 문장으로 이 부분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럴 수 있다. 소설적 장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냥 받아들이고 나머지 책을 읽었다.

이 책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데, 1부의 첫 세 파트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다루며 이들의 시선으로 '불펜의 시간'을 풀어나가는 책이다. 첫번째로 다뤄지는 인물은 준삼. 야구를 한걸음 밖에서 소비하는 관중, 일반인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선택과 승부의 연속이다. 우리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 빛나는 야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에 대해 풀어나간다.

문제는 악취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구린내를 맡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썩은 내가 날 줄은 몰랐다. 월급이 주는 안정을 누리려면 월급과 세트로 묶인 악취와 모욕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준삼은 그 모든 걸 잘 견뎌볼 작정이었다.

두번째 인물은 혁오. 계속 소개하는 고졸 최고 연봉의 장래가 유망한 선수. 모든게 완벽해서 실패할리 없는 선수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불펜에서의 삶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의뭉스러운 점이 많다. 대체 왜 야구를 저렇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 야구 경기에서 그런 의문은 한경기에도 여러번 나온다. 하지만 야구의 신이라 불리는 선수들도 한 경기는 망칠 수 있기 때문에, 패전이 없는 무패의 투수나 실수가 없는 수비수, 아웃이 없는 타자는 없기 때문에 모든걸 승부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모두가 전제로 깔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절대 일부러 그러지 않는다는 믿음. 하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 혁오는 의심을 받는다. 세번째 인물로부터.

타이푼의 권혁오는 이기는 경기에서 계투로 나와 1이닝, 많으면 2이닝을 아주 잘 던지는 선수였다. 하지만 점수가 1, 2점 차로 박빙인 경기나 경기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9회에 등판하면 딴판이었다. 아마추어 선수보다 못한 제구력으로 볼넷을 남발했다. 멘탈이 약한 선수, 승리를 지킬 수는 있지만, 승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투수, 장점과 한계가 명확한 투수의 대명사가 권혁오였다.

세번째 인물은 기현. 기현은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지만 여자야구선수를 위한 길이 없어 기자가 된 인물이다.  신입 때부터 특종을 터뜨리며  야심을 키워가던 기현은 두 번째 특종을 잡기 위해 야구계 승부조작을 파헤치다 혁오의 비밀에 다가가게 되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멈춰서게 된다.

회사에선 일찌감치 대박을 터뜨린 신입 기자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신입이 맡지 않을 법한 일들이 기현에게 주어졌다. 시기도 많았다. 도대체 뭘 바라는 애인지 모르겠다는 게 기현을 향한 선배들의 평이었고, 뭐라도 된 것처럼 나대는 꼴이 재수 없다는 게 동기들의 평이었다. 기현은 그들의 상사가 될 미래를 그리며 두 번째 특종을 위해 매일 밤 김승일이 지목했던 다섯 선수의 경기 결과를 확인했다. 권혁오를 주시했다.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 나가는 이야기는 숨겨져있는 한명의 인물이 혁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드러나며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가 완성이 된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 놓여져 있는 준삼, 혁오, 기현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교적 직설적으로 책에 드러난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놓쳐보기로 했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
--- p.208
혁오는 기자가 아니라 자기를 촬영 중인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승부조작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야구는 승부를 조작하는 야구가 아니라 승부를 잊으려고 한 야구였습니다.”
--- p.225

야구는 이기기 위해 하는 스포츠다. 하지만 그 어떤 경기에서도 야구는 승부를 보장하지 않는다. 패배할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모든게 끝날 수도있다. 반면에 그런 어려운 순간들을 견디고 나면 가끔 거짓말같은 역전을 해내기도 한다. 야구에서 승부란 '승리'외의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 승리만을 위해 아등바등 살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엔 아무것도 없을거라는 것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야구는 9이닝이 끝인 것 같지만, 사실 계절처럼 언제나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승부의 결과는 순간으로 남지만 그 경기에 임하는 나 자신만큼은 나에게 영원하기 때문에.

야구 선수의 눈물을 떠올리면 언제나 박찬호 선수의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이 생각난다. 국가대표의 무게를 아는 선수의 기자회견에서의 눈물의 의미가 너무나도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박찬호 선수는 이때 메이저리그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그야말로 '불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기였다. 그런 자신이 더 이상 국가대표도 잘하고 동시에 메이저리그에서도 경쟁력을 보이는게 힘들다고 인정하는 순간이 바로 이 기자회견이었다.

이 모습이 박찬호 선수가 승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그는 승부에 임하는 마음보다 더 큰 마음으로 마지막을 선언했다. 그리고 결연히 불펜의 시간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불펜의 시간에 들어선 박찬호 선수는 124승째를 거두며 아시아 최다승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꼭 선발투수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불펜에서의 1이닝으로 승리투수가 된다. 불펜의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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